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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의 우산을 쓴 과학기술적 예술 실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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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45회 작성일22-10-2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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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의 우산을 쓴 과학기술적 예술 실천들



 

                                                윤민화_독립 전시기획자



 

이른바 포스트휴먼을 화두로 다양한 동시대의 논점들이 연결되고 있다.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는 과학적 성찰과 철학적 전환, 촘촘히 연결된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네트워크에 대한 사유, 나아가 다른 존재들 사이의 교차에 대한 문제까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하며 형성되고 있는 포스트휴먼 담론을 다각도에서 바라본 윤민화의 글을 소개한다.


당신은, “우리는 휴머니즘이란 낱말의 의미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읍니까?”라고 묻는다.
당신의 물음은 휴머니즘이란 낱말을 고집하고자 하는 당신의 염원을 전제할뿐더러
이 낱말이 그것의 의미를 상실해버렸다는 고백까지도 함축한다.
(하이데거, 1949;160)


철학적으로 휴머니즘 주체가 해체된 이래 과연 그 뒤를 이을 포스트휴먼이 무엇인가를 두고 다양한 논의가 경쟁하듯이 등장하고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근대적 휴머니즘을 극복하고 과학기술 시대에 알맞은 인간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모색하는 여러 담론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철학적, 문화적 그리고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을 한 축으로 하고, 그 반대편에 트랜스휴머니즘이 있으며, 여성주의의 흐름을 잇는 신유물론, 다양한 진영의 안티휴머니즘, 객체지향적 존재론 등을 아우르고 있다. 다양한 맥락의 철학적 유산을 계승하거나 탈피하려는 이 운동들 모두에게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신체에 보조 장치를 하나 이식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휴먼인가?”-“아니요. 아직은.”

포스트휴먼이라는 우산 용어에 포괄되는 운동 중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비판적·문화적·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일 것이다. 이 두 흐름은 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를 완전히 다르게 사용하며, 사실상 그 뿌리와 관점 전반에 거의 공통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첨단 생명기술, 정보기술, 나노기술 등을 활용해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능력이나 특성을 개선할 것을 촉구하는 운동으로, 여기에서의 포스트휴먼은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를 말한다. 만약 당신이 〈이어즈&이어즈(Years and Years)〉(2019) 같은 드라마 시리즈에 관한 리뷰에서 포스트휴먼이나 포스트휴머니즘과 같은 용어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트랜스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말하는 포스트휴먼 혹은 포스트휴머니즘일 가능성이 크다. 이 시리즈에 등장한 통신 기술과 결합한 신체를 가진 캐릭터처럼, 인간 존재가 자신을 극단적으로 변형해서 “포스트휴먼”이 되리라 전망하는 관점은 일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게 중요한 화두다. 따라서 이들은 재생 의학, 획기적인 수명 연장, 마인드 업로딩, 냉동 보관과 같은 가설적인 기술에 호의적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게 “우리는 이미 포스트휴먼인가요?”하고 묻는다면 어떨까. 아마 대답은 “아니요. 아직은.”일 것이다. 이들은 가까운 미래에 마인드 업로딩과 같은 사변적 기술이 인간적 의식과 기계적 집합체의 혼종적인 동시 출현으로 실현되기를 바란다. 더는 생물학적 신체를 가진 인간으로 간주할 수 없는 포스트휴먼의 도래는 누군가에게는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상정하는 포스트휴먼은 아직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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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ar Yoldas, 〈Hi-Cortex〉, 2013
(이미지 출처:https://www.pinaryoldas.info/)

터키 출신의 예술가 피나르 욜다스(Pinar Yoldas)의 “맞춤 아기(designer baby)”들은 생명 형식의 진화를 보여준다. 2013년 이스탄불 개인전에서 욜다스가 발표한 〈BA25™〉과 〈Humanimal™〉, 〈Hi-Cortex™〉 등의 작업들은 강화된 신피질로 제작된 일종의 맞춤 아기들이다. 이들은 아직 세부적인 기관으로 충분히 분화하지 못한 잠재된 생명을 대변한다. 이 아기들은 인류의 미래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미생물과 함께한 우리의 기원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신체적, 인지적, 정서적, 미적, 사회적 향상(enhancement)을 위해 대뇌변연계를 강화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매우 뛰어난 공감 능력을 지닌 아기의 디자인을 시도했다. 욜다스의 작품과 같이 바이오아트는 살아 있는 재료, 즉 바이오 미디어(biomedia)의 기술적 활용을 통해 예술 실천에 전환점을 마련했다. 기술에 의한 인간 및 인간 신체의 변화를 표상하는 신체변형미술, 바이오아트는 트랜스휴머니즘의 관점을 예술 작품 제작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특히 바이오아트는 인간을 위한 ‘생명기술’ 자체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문화적 문제들을 탐구하고 표현해왔다. 바이오아트 예술가들은 유전자 조작을 활용해 돌연변이를 유도하거나, 진화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은, 예술 작품을 위한 매개체가 된다. 조직 배양 기술을 통해 예술가가 원하는 형태의 신체와 기관을 형성하기도 한다.(신승철, 2016:84)
욜다스의 맞춤 아기들처럼 새로운 인류는 신체뿐 아니라 정서까지도 강화한, 향상된 공감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담론에서 실제로 주장되고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인간 향상은 새로운 세대 전반에 걸친 도덕적 향상까지도 포함한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최근 몇 세기 동안 인간 삶의 조건이 급격히 변화했으나, 인간의 심리적·도덕적 특성의 대부분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전 지구적 불평등, 대량 살상무기, 기후변화 및 환경파괴와 같이 현재 당면한 전 지구적 문제들은 우리의 마음이 미처 적응하지 못해 해결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결함이 재앙을 부를 수 있는 가능성에 대비해 인간 도덕성의 향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신상규, 2014) 물론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향상을 끌어내려는 생각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또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휴먼인가요?”-“네, 그렇습니다.”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프란체스카 페란도(Francesca Ferrando)는 인간주의를 해체하고자 하는 비판적·문화적·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이 종종 백인이며 남성인 문화적 패권에 속하는 사상가, 예술가 또는 이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페란도, 2021:47) 이러한 점은 앞서 본 바이오아트의 일부 경향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살아있는 신체를 재료로 생명을 다루는 예술가의 인간중심적이고 비윤리적인 태도에서 흔히 감지되어 왔다.
이에 페란도는 포스트휴먼 미학에서 여성주의 예술가들의 계보를 구축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단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다양한 차이를 갖는 사회적, 개인적 맥락과 상황에서의 인간성을 드러내는 작업으로부터 포스트휴먼 미학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란도는 미국의 예술가 안나 콜맨 래드(Anna Coleman Ladd)가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위해 제작한 안면 보철 작업을 포스트휴먼 미학의 원천 중 하나로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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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당한 군인을 위해 마스크를 제작하는 안나 래드
(이미지 출처:https://allthatsinteresting.com/anna-coleman-lad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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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 보철 장치를 착용한 군인
(이미지 출처: https://allthatsinteresting.com/anna-coleman-ladd#1)



래드는 주로 얇은 구리판을 사용하여 소실된 안면을 보완할 수 있는 일종의 가면을 제작했다. 페란도는 전쟁으로 인한 신체 훼손과 다다(Dada) 사이의 연관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고 하면서, 래드의 작업으로부터 다다의 미적 실천을 연결하며 포스트휴먼 미학의 계보적 원천을 발견한다. 다다의 하이브리드 신체에 대한 미적 실험은 20세기 중반 이후 여성주의와 함께 신체를 활용한 퍼포먼스 예술로 이어지며, 마침내 90년대 이후 사이버페미니즘(Cyberfeminism)으로부터 바이오아트, 아프로퓨쳐리즘(Afrofuturism)과 치카나퓨쳐리즘(Chicanafuturism)1까지 이어지는 경향은 포스트휴먼적 전회에 기여한 예술적 계보라고 정리한다.(페란도, 2021)


페란도가 백인이나 남성 중심의 패권적 주류 미술이 아니라, 여성주의로부터 포스트휴먼 미학의 계보를 찾고자 하는 것은 비판적·문화적·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의 급진적인 해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 없이, 인간에 대한 이 근본적인 재고는 여성주의의 흐름 안에서 그 계보적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21세기의 첫 20년을 보내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형성 중인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의 원천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인간주의에 관한 편지」(1947)로 거슬러 올라가며, 포스트모더니즘, 차이 연구(젠더 연구, 비판적 인종 연구, 퀴어 이론, 탈식민 이론, 장애 연구 등) 그리고 사이보그 연구를 포함한다. 이때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특히 문학 비평의 영역에서 발전된 포스트휴먼의 한 측면을 가리키며, 특히 캐서린 헤일즈(Katherine Hayles)의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1999)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언급된다. 이후 포스트휴머니즘의 전회는 문화 연구로 수용되었다. 문화적 포스트휴머니즘에 핵심적으로 기여한 것이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이보그 이론(1985)이다. 이후 문화적 포스트휴머니즘은 동물 연구로도 연결된다. 이러한 포스트휴머니즘의 여러 측면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페란도, 2021:17)


무엇보다도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탈-인간주의, 탈-인류중심주의, 탈-이원론이 동시에 다뤄지는 장소이다. 탈-인간주의는 인간 경험의 다수성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 인간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 즉 인간(들)로 파악된다. 그럼으로써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인간주의 전통을 약화한다. 탈-인류중심주의는 비인간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탈중심화를 말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종이 위계적 구도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간에 대한 대다수의 역사적 논의에서 존재론적 특권을 당연시해왔음을 시인한다. 탈-이원론은 이원론이 정체성을 정의하는 공고한 방식으로써 사용되어 왔으며 닫힌 자아 개념에 기초하고 “우리"/”그들", “친구”/”적", “문명"/”야만" 등등의 상징적 이분법에서 실현되어 왔다는 자각에 의존한다. (페란도, 2021:126-128)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미 포스트휴먼인가?”라고 묻는다면, 이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앞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아직 아니다”라고 암시했던 것과는 퍽 다르다.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에 따르면, 포스트휴먼이 되기 위해서는 물질적이고 역동적이고 응답적인 과정 안에서 우리의 위치, 즉 존재를 반성해야 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우리의 암묵적이고 명시적인 편견과 특권을 자각하는 것이다. 편견과 특권은 그저 존재론적 인식을 제한할 뿐이다. 열린 연결망으로서의 우리의 위치에 재접근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정체성을 포함해서 닫힌 정체성들의 근본적인 해체를 수행하는 일이 요청된다.(페란도, 2021:366)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한편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2009)에서 근대주의를 향해 거침없이 포화를 퍼붓는데, 그 땔감은 근대주의가 흘리고 간 것들에서 주워다 쓴 것들이었다. 라투르에게 근대 헌법이 보장하는 자연과 사회, 정화와 매개 작용은 이중적 모순이자 근대적 모순으로 이해되는데, 근대인들은 그 구분들 사이에 증식되어 온 ‘준대상’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눈감아 왔기 때문이다. 라투르의 땔감은 다름 아닌, 이 준대상, 하이브리드, 집합체, 또는 자연들-문화들의 산물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근대인이라고 불렀지만, 결코 그래 본 적 없었던 근대인의 사고방식의 모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근대인인 적도 없었는데 ‘탈’근대를 논하는 이론가들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탈근대주의의 징후는 그저 반어적인 절망으로 인도될 뿐이라며 냉소하고, 그들이 비판의 재료를 하이브리드들의 증식 작용과 정화 작용 양자 모두를 따르는 범하는 한, 탈근대인들은 마비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근대적 시간의 경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며, 준대상에 입각한 나선형 시간성으로 재구성된 다-시간적인 것을 제안한다.


근대 헌법이 잔여물이라며 설명하기를 포기한 것들은 최근 여러 얼굴을 하고 우리 곁에 섰다. 하이브리드들, 괴물들, 사이보그, 트릭스터... 여기에 더해서 과학/사회, 자연/문화와 같은 이분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코로나19, 핵폐기장, 대형 기술 참사, 줄기세포, 감시 기술 등-이 도처에 있다. 라투르는 이렇게 사물이 인간과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해서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로 ‘물정치’를 제안한다. 이제 막 설명이 시작된 존재들에게는 근대인들이 설계한 경기장이 아닌 더 넓고 더 논쟁적인 경기장을 마련해야 한다. 인간만을 대변하는 정치에서 사물을 제대로 대변하는 정치로 이행하자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그는 2005년에 독일의 ZKM센터의 대표인 페터 바이벨(Peter Weibel)과 함께 사물을 정치에 개입시켰을 때 열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전시 Making Things Public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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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ar at Kennedy Space Center in Cape Canaveral, Florida, March 7, 2003, photo
ⓒ NASA/Getty Images
(이미지 출처:http://www.bruno-latour.fr/sites/default/files/downloads/96-MTP-DING.pdf)



라투르는 이 전시에서 그동안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해서 마치 정치적 공간 바깥에 있는 양 취급받아 온 ‘객체’를 “사물의 문제(matters of thing)”, 나아가 “관심의 문제(matters of concern)”로 변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2003년 2월 컬럼비아호 폭발 사고 이후 조사자들이 파편을 격납고의 격자 모양이 그려진 바닥에 놓은 ‘어셈블리 드로잉’(조립도면)을 사례로 든다. 발사대에서 완벽하고 안전한 모습으로 있던 콜롬비아호라는 객체가 바닥에 놓인 사물의 집회로 드러난 후, 나사의 관료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이 우주선이 제작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라투르는 이렇게 사물들의 재현 방식을 문제 삼는 예술은 과학적 설명과 점점 비슷해진다고 말한다.(라투르, 2010: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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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 Free Range Grain, 2003. ⓒCAE
(이미지 출처:http://critical-art.net/)



전문성의 정치에 도전하는 시민과학 예술

라투르가 ‘물정치'를 드러내는 사물의 집회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예술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이러한 예술적 실천은 과학기술의 객관성에 도전하고, 과학적 지식을 인문학적으로 사유하며, 사회구성주의적으로 분석하고, 전문성의 정치에 균열을 내어 온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의 방법론과도 연결된다. 사실 라투르 본인이 STS의 주요한 이론가 중 한 명이며, 라투르가 주장한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는 STS의 방법론이자 신유물론으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담론이기 때문이다. 예술에서도 과학기술 지식이 생산되는 방식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과 중립성에 균열을 내고자 STS적인 방법으로 예술적 실천을 해 온 사례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으로 크리티컬 아트 앙상블(Critical Art Ensemble, CAE)이 있다.


CAE는 1987년 미술, 비판이론, 기술, 정치적 행동주의 등의 상호교차를 목표로 설립된 단체로, 상황적이고, 일시적이고, 자기종결적이라고 자신들의 예술적 실천의 성격을 설명한다. 특히 분자생물학·생화학 분야의 지식에 개입한 과학적 실험을 진행하는 등 과학지식을 둘러싼 특정한 이슈에 정치적인 개입을 하고 있다. 이들이 했던 다양한 프로젝트 중에서도 2003년부터 2004년까지 2년 동안 진행했던 〈무료 곡물 검사(Free Range Grain)〉는 기본적인 분자생물학 기술을 이용해 전 지구적으로 유통되는 농산물의 유전자 조작 여부를 테스트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갤러리에 임시로 생물학 실험실을 설치하고 관객들이 가져온 음식물들이 유전자 조작된 것인지 아닌지를 실험을 통해 알려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사람들이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그 배후에 있는 문제들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만들고자 한 것인데, 이것은 당시 유전자 조작된 식물들의 유통을 강경히 금지하던 EU의 정책과도 관련이 있었다. 식품 유통에 관한 이런 EU의 법안은 미국의 식품 무역계에 타격을 주었고, 미국은 이 법안에 적절히 대응할 방안을 마련했다. 그것은 바로 “융통성 있는 라벨링 작업"으로, 적절히 법망을 통과할 법한 라벨링 작업을 통해 유전자 조직 식품을 수출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리고자 CAE는 공개 실험실을 만들어 음식들을 테스트하기 시작한 것이다. 관객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실험 도구들을 갤러리에 가져다 놓고, 이를 통해 유전자 조작 농산물에 대해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가짜 정보와 지식이 아니라, 식품 순도(Food Purify)에 대한 대중적 차원과 이해를 불러일으켜, 소비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먹거리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장을 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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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il performance group, 〈Live: the boundless body〉, 2017.
(이미지 출처:https://recoil-performance.org/productions/live/)



물의 빚는(mattering) 관계들

티나 타프가드(Tina Tarpgaard)는 레코일 퍼포먼스 그룹(Recoil Performance Group)의 창립자이자 무용가이다. 예술적 경험과 예술적 과정에서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하는 그녀는 최근 “관계"에 있어서 관계항을 비인간의 영역으로 넓히는 공연을 선보였다. 〈라이브(LIVE)〉(2017)는 관객 참여형 작품으로, 박테리아와 인간을 위한 참여적 안무로 구성됐다.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의 서식지로서 인간의 미생물적 고찰을 시도한 작품이다. 마이크로바이옴은 장내 미생물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몸속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는 미생물의 유전정보 전체를 일컫는 용어다. 우리 몸에는 3kg의 박테리아가 있다고 하니, 사실 인체는 다양한 존재들의 집합체인 셈이다.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고자, 우리가 어떻게 박테리아와 협력할 수 있을지, 박테리아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인식할 수 있는 공연을 선보였다. 공연에 참여한 관객들은 미생물의 물질성을 적극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서로를 끌어안거나 인체 분비물을 공유하는 등의 행위를 한다. 비인간의 물질을 대면하는 과정을 느끼는 것에 집중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인체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최근 이른바 ‘물질적 전회’라고 할 수 있는 신유물론의 운동이 예술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ANT로 대표되는 신유물론은 후기 포스트모던의 표상주의와 구성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왔다. 특히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로부터 영향을 받은 급진적·구성주의적 여성주의 문헌들이 그 어떤 자연적 가정에 대해서건 구성주의적 함축을 탐색하는 논의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등장한 것이다. 신유물론의 주요 이론가 중 하나인 캐런 버라드(Karen Barad)는 “언어가 문제다. 담론이 문제다. 문화가 문제다.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유일한 것이 물질이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003: 801)고 말한 바 있다. 문화가 물질적으로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은 문화적으로 매개되어 있다고 보는 신유물론은 언어와 물질 사이에 그 어떤 분리도 상정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신유물론은 비인간 동물에 대한 연구에도 새로운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최명애, 2018). 신유물론을 대표하는 ANT는 동물연구에 적용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담론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때 물질은 고정되거나 수동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동적이고 변화무쌍하며 내재적으로 얽혀 있으며 회절적이고 수행적인 과정으로써 “물질화의 과정”이 강조되고, 물질화(materialization)의 관점으로 물질을 보면 존재는 “관계적 존재론(relational ontology)”으로 설명된다. 버라드는 “관계적 존재론은 (인간적이자 비인간적인) 물질적 물체(또는 신체)에 대한 나의 수행적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설명의 기초를 이룬다”라고 말한다.(버라드, 2007:139). 버라드는 “특히 물질의 역동성을 인정하고 고려하는, 기술과학과 다른 자연문화적 실천을 이해하기 위한 포스트휴먼적인 수행적 접근”(135)을 주장하며, 물질을 과학적 관점에서 탐구하고, 현대 물리학의 포스트휴먼 논쟁에 대한 관련성을 주장한다.(페란도, 2021:317)



탈-인간중심적 예술의 가능성

지금까지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용어가 포괄하는 다양한 운동의 경향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포스트휴먼 미학을 생성해 온 일련의 예술 실천들을 부분적으로 겹쳐 보았다. 종종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 실천이 어떻게 포스트휴먼 담론의 우산 아래에서 그 미학을 개진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포스트휴머니즘의 계보를 보면, 탈-인간중심적 관점에서의 생명 영역의 탐구는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을 구분하는 선이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부각했으며, 인간/비인간이라는 위계적 이분법의 필연성을 가정하는 “비인간” 또한 단 하나의 범주로도 분류되거나 단순화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냈다. 이러한 포스트휴머니즘적 전회는 종 차별주의와 인간중심적 습관의 파괴적 효과를 자각하고, 기술에서 생태-기술로, 정의에서 다종적 정의로, “인간”이라는 일반화된 자기-명명에서 “인간 동물"이라는 보다 정확한 생물학적 용어로의 이행을 알리는 재배치를 허용하는 일이었다.(헤일즈, 1999) 이것은 비판적·문화적·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이 역사적, 사회적, 언어적 인간 개념을 해체하고, 인간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결론 안에서 일반화된 보편주의에서 상황적 관점주의로 향하는 인식론적 움직임에 이끌려 온 계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미” 포스트휴먼이 되었으며, 다만 “어떤” 포스트휴먼이 되는지가 중요하다던 헤일즈의 말을 다시 받아쓰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인간종에 속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적 입장을 함축하지는 않을 것이다.”(헤일즈1999: 366)



참고 문헌
브뤼노 라투르, 홍성욱 옮김, 『인간·사물·동맹』, 이음, 2010.
브뤼노 라투르, 홍철기 옮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갈무리, 2009.
신상규,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포스트휴먼과 트랜스 휴머니즘』, 아카넷, 2014.
신승철, 『바이오아트 생명의 예술』, 미진사, 2016.
인간-동물 연구 네트워크, 『동물의 품 안에서』, 포도밭출판사, 2022.
전혜숙, 『인류세의 미술』, 선인, 2021.
캐서린 헤일즈, 허진 옮김,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플래닛, 2013.
최명애, 「한국 인문지리학의 ‘동물 전환’을 위하여: 영미 동물지리학의 발전과 주요 쟁점」, 『공간과 사회』 제 63권, 2018.
프란체스카 페란도, 이지선 옮김,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 아카넷, 2021.
Giovanni Aloi & Susan MacHugh, Posthumanism in Art and Science: A reader, Columbia Univ. Press, 2021.

윤민화_독립 전시기획자불문학과 미술사, 예술학을 전공한 뒤 최근 박사과정에서 포스트휴먼 연구를 하고 있다. 변화무쌍하고 혼잡하고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세계의 복잡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과학기술학(STS)의 경험적 글쓰기의 예술의 적용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ymhcurates@gmail.com
  1. 1)Chicano(남성)/Chicana(여성)는 멕시코계 미국 시민을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