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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와 무용수의 정체성, 그리고 저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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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53회 작성일22-03-12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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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와 무용수의 정체성, 그리고 저자성
김승록, 임은정, 정다슬과의 대화


 

일시: 2022년 2월 20일 오후 5시
장소: 서울무용센터 스튜디오블랙
참석: 권태현(춤in 편집위원, 모더레이터), 김승록(안무가, 무용수), 임은정(안무가, 무용수), 정다슬(안무가, 무용수)
편집: 권태현



*본 좌담은 발열체크, 소독, 거리두기 등 코로나 방역 수칙을 준수하여 진행하였습니다.


무용수가 창안한 움직임이 그대로 안무가 될 때, 그 안무는 누구의 것이 되는가. 동시대 안무 창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문제에서 시작하여, 무용수와 안무가의 위계, 그리고 각각의 정체성과 자율성, 저자성, 나아가 아주 구체적인 크레딧 표기의 문제까지. 안무가와 무용수 사이를 오가면서 활발히 활동하는 김승록, 임은정, 정다슬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태현: 이번 『춤in』을 기획하면서 안무의 저자성에 대해 다방면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특히 동시대 안무의 방법론에서는 춤의 저자성 문제가 더 복잡한 위상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연의 모든 움직임에 이름표를 다 붙여 놓을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이러한 조건에서 안무가와 무용수라는 역할과 정체성 자체가 의문에 부쳐지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에서 파생되는 논점들을 안무가와 무용수의 정체성을 오가며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저자성이라는 관념적인 문제부터, 아주 구체적인 현장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고민들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간단히 인사와 소개를 하면서 시작할까요?

임은정: 저는 안무 작업도 하지만, 최근에는 주로 퍼포머로 활동하고 있는 임은정입니다. 여기 계신 정다슬 안무가의 작업에도 함께 했었고, 다양한 안무가들과 협업을 해나가고 있어요.

정다슬: 정다슬입니다. 무용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안무에 중점을 두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 주제가 제가 작업을 할 때에도 고민하는 문제들이라 기대가 됩니다.

김승록: 저도 대학 교육 과정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무용수로 교육을 받았어요. 안무가로서 더 공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대학에 진학했고, 이후에는 줄곧 안무 작업을 해나가려고 했지만, 돌아보면 무용수로 더 많이 활동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최근의 안무 경향에서는 무용수로 참여해도 작업 과정에서 안무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고 있어서 안무와 유사한 경험을 지속적으로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용기를 얻어서 제 안무 작업을 시도하고 있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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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임은정, 오른쪽 정다슬 ⓒ오창동


어떻게 무용수/안무가가 되는가

권태현: 여러분의 소개에서 교육적 맥락을 짚어주시는 점이 중요하게 포착됩니다. 무용수나 안무가의 정체성에 있어서도 교육이라는 조건이 중요하게 작동할 것으로 생각이 되어요. 한국의 맥락에서는 대학에서 안무가로 교육받을 수 있는 체계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오기도 했고요. 무용이라는 분야에 어렸을 때부터 무용수로 훈련받으면서 진입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기도 하잖아요.

김승록: 말씀하신 것처럼 일단, 적어도 국내에서는 입시를 통해서 무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안무 작업보다는 바디 컨디셔닝이나 테크닉 중심의 교육을 주로 받으면서 무용계에 진입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마치 안무가가 무용수의 상위 개념인 것처럼, 무용수 경력이 쌓이면 안무를 시도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권태현: 이야기해주신 안무가 무용의 상위 개념처럼 여겨진다는 점이 문제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무용수 경력이 안무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춤을 추는 것과 안무를 창작하는 것 사이에 위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이런 문제가 국내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인지 궁금한데, 혹시 외국 활동 경험이 많으신 다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다슬: 저도 한국에서는 전형적인 무용 입시의 경로를 따라서 무용계에 진입했어요. 고등학교는 예고를 나오고, 입시를 통해 무용과에 진학을 했죠. 그 이후에 정말로 전형적인 커리어를 따라갔다면, 대학에 연계된 무용단에 들어가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그 계열의 교육자가 되는 길을 가게 되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중간에 독일로 공부를 하러 떠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쪽의 무용 교육을 다 경험하게 되었어요. 독일은 무용을 가르치는 학교마다 특성이 매우 달라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무용수를 길러내기 위한 학교도 있고, 안무가를 양성하는 커리큘럼이 특화된 학교도 많아요. 무용수를 배출하는 학교에서도 완벽한 신체 테크닉을 지향하지 않는 교육 과정이 많다는 점도 특이하죠. 제가 교육받은 학교도 무용수를 주로 양성하는 학교였지만, 무용수가 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독일이 안무를 공부할 수 있는 교육적 체계가 한국보다 탄탄하게 잡혀 있고, 더 빠르게 안무가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김승록: 국내에도 무용 창작과가 있는 학교들이 있고, 안무 전공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안무 교육이라는 것이 기존의 무용 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활동하는 중견 안무가가 학교에 와서 자신의 안무 방법론을 전수하는 것이죠. 춤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게 도제식 교육이 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안무라는 것이 형식적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개인의 예술적 주제를 찾고, 철학적인 사유를 해나갈 수 있는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인데, 대학에서의 안무 교육이 마치 테크닉 교육처럼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임은정: 저도 사실 안무는 학교보다는 현장에서 많이 배웠어요. 물론 학교에서 작업의 기회를 얻고, 그를 통해 안무를 배울 수 있는 선배들을 만나게 되긴 했죠. 그러나 교육적 체계에서 안무에 대해 배운 것보다는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스스로 고민하면서 배운 것이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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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록 ⓒ오창동


안무가와 무용수의 위계

김승록: 이런 교육적 조건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안무를 하는 것이나 춤을 추는 것 중에서 자신이 어떤 것을 지향하는지 스스로 찾아 나가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정다슬: 저는 안무와 무용을 완전히 가르는 것에 대한 고민도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둘을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둘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용과 안무의 관계를 위계로 보는 무용계의 분위기는 확실히 문제가 있고요.

권태현: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안무와 무용의 자율성과 고유성을 더 강조하는 것이 필요할까요? 혹은, 다슬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잘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까요?

임은정: 저 같은 경우에는 계속 퍼포머로 활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서 ‘이제는 네 작업을 해야지’하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어요. 그것이 단지 ‘너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니까 무용수만 할 것이 아니라, 네 이름을 건 안무 작업을 해야지’ 같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 스스로도 퍼포머로 활동을 지속하다 보니 공연에서 제 비중이 커지는 순간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러면서 제가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 의견으로 안무가와 충돌이 생기면 안무가가 ‘그건 나중에 네 작업할 때 하는 게 어떨까’하고 설득하듯이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웃음) 이런 식으로 무용수로 활동하다 보면 ‘내 것’을 해야 하는 시기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권태현: 저는 방금 말씀해주신 것에서 ‘네 작업’, ‘내 것’ 같은 말들이 굉장히 흥미로워요. 춤의 주인을 따지는 문제잖아요. 이런 저자성의 문제가 오늘의 대화에서 중요한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용수의 움직임이 안무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당대의 조건에서, 춤의 저자성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특정한 움직임이 무용수의 것이라고 해도 최종적인 판단과 조합, 연출, 개념은 안무가의 작업이기도 하기에 더 복잡합니다. 은정님이 말씀해주신 것에 비추어보면 협업 과정에서도 실제로 ‘내 작업에서는 일단 나의 판단을 따라라’ 하면서 진행되는 경우도 있고요. 공연 예술이 필연적으로 협업을 수반하기에 발생하는 미묘한 문제들을 꺼내서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김승록: 기본적으로 무용수들에게 소모적인 환경이 있다고 생각해요. 작업을 함께 열심히 만들어도 스포트라이트는 안무가에게 대부분 돌아가는 것이 보편적이죠.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공연은 애초에 공동 창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스텝들과 창작자들이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고,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인데, 그렇게 다양하게 분할된 역할 중에서 안무가는 안무가로서의 역할을, 무용수는 무용수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무용수가 단지 주어진 움직임을 수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움직임을 만들기도 했다면 그것을 제대로 인정해줘야 하는데, 그것이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이 기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권태현: 중요한 지적입니다. 무용 작업이 대체로 안무가와 무용수뿐만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협업이라는 점을 잘 짚어내는 것도 중요해요. 그리고 안무가 또한 그런 다원의 협업 구조의 한 부분을 맡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죠.

김승록: 그래서 무용 작업에서 쉽게 ‘내 것’, ‘네 것’을 말하게 되는 상황 자체에 대한 고민이 생깁니다. 안무가가 만들고 있는 공연을 온전히 ‘내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한다면, 은정님이 말씀하신 사례처럼 협업자들의 제안을 제대로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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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정 ⓒ오창동


저자성의 역설

권태현: 맞아요. 하지만, 온전한 협업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죠. 생각해보면 예술계가 신화적인 예술가를 욕망하기도 하잖아요. 유명한 안무가를 계속 조명하면서 무용계 전체에 더 많은 관심을 유도하고, 그것을 통해서 씬이 자본과 활기를 얻기도 하니까요. 그런 스타 시스템이 있기에 예술가들도 신화적 저자의 자리를 열망하게 되고, 그런 욕망과 에너지로 작동하는 것이 예술계이기도 합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적인 예술가가 되지 않고, 더 윤리적이고 공동체적인 창작을 진지하고 실천적으로 고민하는 예술가들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렇게 저자성을 내려놓고, 그런 문제들을 성찰할수록 예술계는 그를 더 멋지고 강한 저자로 치켜세우곤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저자성의 역설이죠. 협업이라는 방법론 자체가 동시대 예술에서 더 중요해지고, 저자성에 대한 성찰 또한 하나의 미학적 담론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요. 과연 이상적인 협업과 창작이라는 것은 가능할까? 고민이 더 복잡해집니다.

정다슬: 지금 우리의 논의에 앞서 안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무용수의 움직임을 안무가가 자신의 안무로 취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전제는 더 꼼꼼히 살펴봐야 할 문제입니다. 움직임이 안무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죠. 움직임 이외에도 작업의 기본적인 컨셉, 작업의 발전을 조직하는 것,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조율하는 것 등등 안무가는 작업에서 굉장히 다양한 역할을 하고, 그것이 모두 안무를 이룹니다. 무용수가 움직임을 제공했다고 해서, 안무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용수가 안무를 했다고 하긴 어렵다는 것이죠. 제가 안무가의 신화적인 저자성을 보호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왜 안무가라는 역할과 정체성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그것은 일종의 기여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물론 객관적으로 기여도를 판단할 기준 같은 것은 없지만, 모두 다른 역할을 하는 집단 창작에서 안무가의 역할은 가장 높은 기여도와 책임감을 가지게 되니까요.

권태현: 맞아요. 저자(author)이라는 말의 어근을 살펴보면, 승인(authority)하는 역할을 뜻하는 것이잖아요. 단지 명성을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는 그 작업을 승인하면서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도 저자라는 것이 완전히 해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말했듯이 이상적인 공동 창작이라는 것은 불가능하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문제적인 저자성에 대해서 우리 예술계 안에서 세심하게 협의해 나가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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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권태현, 오른쪽 정다슬 ⓒ오창동


크레딧의 문제

권태현: 이런 문제의식을 나누어가면서 언제부터인가 공연의 크레딧 표기가 섬세해지는 경향이 분명히 감지됩니다. 기존에는 ‘안무’, ‘출연’ 등의 크레딧에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그것에 비하여 최근에는 ‘컨셉’, ‘아이디어’, ‘발전’ 등 다양한 역할을 표시하는 것 같아요. 보통 안무가가 컨셉이나 아이디어 등의 크레딧을 가져가고, 구체적인 움직임은 퍼포머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향이겠죠. 다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공연에서 안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움직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런 식의 크레딧이 오히려 개념을 구성하는 사람으로서의 안무가의 역할을 더 강조하는 경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크레딧을 섬세하게 쓰는 것만으로도 이런 고민들을 공연의 외적인 차원에서 반영할 수 있는 형식이 되기도 하고요. 여기 함께 이야기 나누고 계신 여러분은 작업하실 때 크레딧을 어떻게 표기하시나요?

김승록: 말씀해주신 것처럼 그렇게 다양한 크레딧을 사용하시는 분도 있고, 기존의 안무가, 무용수 등의 구분이 애초에 그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냥 쓰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경우에는 포스터 등 이름이 노출되는 영역에 일부러 자신을 잘 노출하지 않으려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리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작업하자고 이야기만 하고, 결국 안무가가 독단적으로 안무를 결정을 하게 되었을 때, 무용수가 안무에 기여한 것처럼 크레딧이 표시되면 배신감이 들기도 해요. 그런 크레딧이 마치 작업 과정이 평등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수단으로 쓰이는 것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겠죠.

권태현: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섬세한 크레딧이 일종의 트렌드가 되면서, ‘나는 평등한 구조를 지향하는 안무가’라는 이미지를 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릴 때도 있지요. 배신감이라고 하시니 안무가와 무용수 사이의 관계를 정말 세심히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감정적인 문제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여러분은 특히 안무가와 무용수를 겸업하고 계신 분들이니까 경험에 비추어서 관련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정다슬: 유럽에서도 안무가, 무용수 식의 크레딧 표기를 쓰지 않고 세심하게 역할을 분화해서 쓰려는 노력이 이전부터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제가 무용수로 참여했던 유럽 안무가의 작업에서는 역할을 세분화하는 크레딧과는 정반대로 모두가 함께 참여하여 만든 것처럼 이름들을 나열했어요. 공동 창작 상황에서 역할을 잘게 구분하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봅니다. 이처럼 작업의 방법론에 따라서 크레딧을 표기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동시대 무용 작업이라고 해도 무용수가 주어진 움직임만 수행하게 되는 작업도 있고, 반대로 무용수가 많은 부분 자율성을 가지고 명확히 움직임을 창안하거나, 무용수의 몸 자체가 그냥 내세워지는 작업도 있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따라서 다른 크레딧 표기를 고민해볼 수 있겠죠. 협업의 형태가 굉장히 다양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과정을 공동으로 결정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방식의 크레딧도 가능하고,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더 면밀하게 표시하는 방식도 모두 가능하다고 봅니다.

권태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협업이라는 말이 너무 넓게 쓰이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점점 더 많은 예술 작업이 협업의 형태를 띠고 있잖아요. 사실, 어떤 예술 작업을 하더라도 혼자 할 수는 없는 것이죠. 우리가 협업이나 협력이라는 말을 쉽게 쓰고 있지만, 하나의 협업은 없다는 점을 짚어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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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승록, 권태현, 임은정, 정다슬 ⓒ오창동


기존의 정체성을 흔드는 수행

권태현: 그리고 지금 다슬님의 이야기에서 안무가라는 정체성 자체가 논점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안무가라는 선행되어 있는 정체성을 수행함으로써 안무가가 되기도 하고, 안무가로 호명되기도 하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안무에서의 역할들을 고민하는 것은 기존의 안무가라는 정체성을 흔드는 것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공연에서 주어진 역할의 이름을 고민하는 문제는 단지 크레딧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안무 고유의 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무가라는 역할과 그 정체성을 성찰하는 것은 안무와 안무가라는 것을 확장하는 실천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다슬: 제가 했던 안무 작업의 경우에는, 최대한 많은 부분을 공동으로 만들어나가려고 했지만, 그래도 초기의 기획과 제안은 제가 제시했기에 ‘아이디어’라는 크레딧으로 제 이름을 표기하고, 나머지는 공동 크레딧을 가져간 적이 있어요. 저는 그런 역할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고요. 최근에도 안무와 함께 ‘컨셉’이라는 크레딧을 쓰기도 했습니다. 제가 안무라는 것을 움직임을 만드는 것보다는, 컨셉을 제시하는 역할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김승록: 저는 안무가의 역할이 무언가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최초의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나아가 그것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접점들을 수집하고, 선택하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계속 다른 것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냥 ‘안무’라는 기존의 역할 구분을 쓰는 편이에요. ‘내가 생각하는 안무는 이런 것이야’라는 입장을 부각하기 위해서 다른 말을 쓰기보다는, 반대로 ‘안무’라는 말 안에서 안무를 바꾸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무용수의 역할도 마찬가지예요. 동시대 무용에서는 무용수가 신체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창작적인 역량을 제공하는 것 또한 무용수의 역할이 되니까요. 물론, 안무가들이 정말로 안무가를 착취하듯 작업하던 과거의 안 좋은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무가와 무용수 사이의 저자성을 따지기보다는, 무용수라는 이름에 자체에 움직임에 대한 일정 수준의 저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확대하는 편이 맞지 않을까요.

임은정: 안무가가 스스로 안무는 컨셉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혹은 무용수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그냥 무용수의 캐릭터를 소비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해요. 컨셉만 주고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는 경우에 퍼포머의 입장은 굉장히 곤란해집니다. 결국 관객들 앞에 서는 것은 퍼포머가 되기 때문에 퍼포머의 에너지와 역량 자체가 그대로 작업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물론, 그런 퍼포머를 섭외하고 자신의 작업에 선택한 것도 중요한 역할입니다. 하지만, 안무가가 움직임 차원에서 하는 것이 없이 퍼포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하면 단지 소비되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아요.

김승록: 그런 ‘방목형 안무’를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죠. 말씀하신 것처럼 물론 좋은 퍼포머를 선택하는 것도 안무가의 실력입니다. 그리고, 일정 수준의 방목 이후에 적절한 피드백을 통해서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더 좋은 선택을 만들어나가는 역할을 한다면 좋은 안무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작업 과정에서 무용수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명목으로 무책임하게 되어버리는 경우를 저도 종종 경험합니다. 갈등하지 않는 것은 결코 좋은 협업이 아니거든요. 그럴 경우에 무용수는 ‘편히 헤엄치시면 됩니다’하고는 바다에 빠뜨려버리는 느낌을 받아요.

권태현: 그런 작업 상황에서 또 중요하게 짚을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무용수가 그 안무 작업의 대체 불가능한 요소가 되어버린다는 점이죠. 그 무용수 없이는 작업을 재연하거나 레퍼토리로 만들기도 쉽지 않아 지는 것이잖아요.

김승록: 배터리를 갈아 끼우듯이 만들어진 형식에 무용수를 바꿔나가는 안무가도 있습니다. 무용수가 작업 도중에 사정이 생겨 하차하는 경우에 대체되는 무용수가 이전 무용수의 연습 영상을 보고서 그대로 수행하기를 요구당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무용수 입장에서는 굉장히 난처하죠.

정다슬: 피나 바우쉬 같은 경우에는 소위 오리지널 캐스트의 역할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레퍼토리가 된 작업들도 오리지널 캐스트의 이름을 크레딧에 계속 넣기도 해요. 이후에 공연을 하게 되는 무용수들은 피나 바우쉬가 제시하는 컨셉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처음 춤을 추었던 무용수의 상태와 캐릭터까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까지 오니 관념적인 저자라는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다시 역할의 문제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작업을 할 때,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을 세심히 규정하면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요. 기존의 안무가나 무용수 등의 역할이 어떤 것이냐에 상관없이 작업을 위해 모인 사람들 사이의 합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지금 이야기되는 문제들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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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현 ⓒ오창동

권태현: 일종의 실천 방안을 제시해주셨네요. 말씀해주신 것을 개념의 차원에서 고민해보자면, 안무가나 무용수라는 정체성의 기존 모델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번 새로 규정하고 협의해나가는 과정 자체를 안무 작업에 포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역할을 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부를 것이다’하는 문제에 대한 세심한 협의를 매 작업마다 해나가는 것이죠. 번거롭지만, 그것이 씬 전체가 이상적인 안무가라는 정체성을 규정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무가는 자고로 이래야 한다’는 규정을 내세우기보다 안무가라는 정체성의 유동성을 더욱 인정하는 것이죠.
오늘 다양한 방면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혹시 관련하여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남겨주세요.

김승록: 무엇보다 무용수와 안무가의 위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면 합니다. 선택권과 자율성의 문제가 무조건 위계의 문제처럼 받아들여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또한, 무용수로 경력을 쌓아 안무가가 되는 상위의 개념이 아니라, 안무가와 무용수는 별개의 역할이라는 점에 대한 인식 확산도 필요할 것입니다.

임은정: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언제까지 퍼포머로 활동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긴 해요. 그래서 안무가가 되어 직접 작업을 만들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정다슬: 안무가로서의 책임이나 무용수의 창의성 등 모두 어떻게 작업에 기여할 것인지와 관련된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안무가나 무용수 같이 이름 붙여진 역할뿐만 아니라, 작업에 참여하는 모든 예술가들이 함께 그런 태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권태현: 알찬 대화를 통해서 더 많은 고민을 안고 갑니다. 오늘 이야기 나누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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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임은정, 권태현, 정다슬, 김승록 ⓒ오창동
권태현_춤in 편집위원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7000eichen@gmail.com
김승록_안무가안무자와 무용수 사이에서 공연을 탐험하는 중이다. 최선의 협업과 지속이 가능한 창작환경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수다하기 좋아하며, 무가치, 혼돈, 정체, 불안, 기피와 같은 것들이 창작에서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는 ‘무용은 상태이다’라는 주제를 위한 ‘상태는 연습이 가능한가?’에 대해 탐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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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정_안무가나의 몸이 어떤 움직임을 원하고, 그 움직임이 어떤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지 오로지 몸에 집중할 때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서로 합의된 상황에 몸들을 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퍼포머로 주로 활동하고, 최근에는 안무 작업에 조금 더 집중해보려고 시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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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슬_안무가정다슬은 서울과 함부르크를 베이스로 공연예술 활동을 한다. 공연예술 요소가 가진 다양한 기능을 토대로 사회적, 문화적 장치로서의 안무, 그리고 안무 안에서 춤이 아닌 것을 탐구한다. 끊임없이 부유하며 비물질 혹은 물질로 규정되는 안무의 속성, 나아가 그것을 소유하거나 소장하고자 하는 제스처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이어나간다. 최근에는 작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정다슬파운데이션’의 초석을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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