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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 그 역할에 대한 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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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57회 작성일22-03-1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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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 그 역할에 대한 재고



박신애(코리아댄스어브로드 대표)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작품의 저자로 명시되는 예술가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창작에 참여한다. 각각의 분야에서 창작에 참여하는 방식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획’, ‘프로듀서’라 지칭되는 사람들과 그 분야는 어떠할까? 공연예술, 무용계에서 ‘프로듀서’는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방식으로 저자성을 획득해 크리에이티브 한 작업들을 이어 나갈 수 있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2020년 코로나19(COVID-19)의 범세계적 유행이 시작된 이후, 나는 그동안 내가 주요업무로 수행해왔던 국제 교류보다는 국내에 체류하며 ‘프로듀싱(producing)’을 하는 것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가 포스트 코로나를 위한 준비의 시간, 혹은 좋은 콘텐츠를 발굴할 기회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굳은 의지로 신작 제작에 참여했고, 그렇게 지난 2년간 진정한 의미의 ‘생산(producing)’에 투자하는 ‘생산자(Producer)’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실, 해외에서 국제 업무를 할 때 나는 ‘프로듀서’라 불린 적이 별로 없다. 예술경영 측면에서 볼 때 ‘공연기획’ 업무에는 여러 범주가 있는데, 특히 무용 시장의 구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의 범주로 나뉜다. 첫째는 작품의 생산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프로듀서’의 영역이고, 두 번째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유통하고 재공연의 기회를 마련하는 ‘프로모터(Promotor)’의 영역, 마지막으로 극장이라는 공간과 조직·기관에 바탕을 두고 공연의 기회를 제공하며 관객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프리젠터(Presenter)’의 영역이다. 나는 주로 극장이나 축제의 요청을 받아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이미 기획된 프로그램에 알맞은 아티스트를 연결해 주는 ‘프로그래머’ 또는 ‘큐레이터(Curator)’로 일했으니 ‘프로듀서’보다는 ‘프로모터’나 ‘프리젠터’의 역할을 더 많이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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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열린 Big Mouth 범아시아 무용 페스티벌(Big Mouth: Pan-Asian Dance Festival) 포스터.
해당 페스티벌은 일회성으로 기획되었다.
필자는 해당 기획에 초청되어(비상주 형태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게스트 큐레이터’라 명기되었다.

축제나 조직에 소속되어 ‘기획’을 하는 것과 민간단체의 프로듀서로 작업에 참여하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프로덕션의 크기나 예산의 차이도 있겠지만, 실무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축제나 조직에선 역할이 세분되어 있기 때문에 본인이 맡은 구체적인 역할을 수행하면 되는 것에 반해, 민간단체의 프로듀서로 프로덕션에 참여할 때는 많은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는 ‘프로듀서’라는 명칭이 국내 무용계에도 정착되어 있지만, 여전히 프로듀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역할과 범주에 대한 개념은 명확하게 인지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기획자’라는 미명 아래 기획, 행정, 홍보, 매니지먼트를 모두 도맡아 하는 ‘살림꾼’의 몫을 치러내야 하는 것을 당연한 관행으로 여기면서도, 그에 반해 그들이 마땅히 인정받아야 할 저자성에 대해서는 무시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공연을 진행할 때 수반되는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정작 공연 진행 과정에서 발현되는 프로듀서로서의 저자성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PD는 정산은 본인이 해야 될 일이 아니라고 안 해주시더라고요.’, ‘무슨 PD가 창작에 관여해요, 기획서나 잘 쓰고 정산이나 잘하면 되는 역할 아닌가요.’, ‘피디는 누구보다 작품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하고 창작 과정에 빠지면 안 되죠. 왜 이렇게 작업에 무심하시죠?’…. 이렇게 상이한 아티스트들의 입장을 두고, 나는 무엇이 ‘프로듀서’의 정체성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에 ‘프로듀서’라는 명칭을 달고 일하고 있는 이들의 고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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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제3회 S.O.U.M(Spectacle Of Unlimited Movements) 페스티벌 포스터.
필자는 해당 축제에 소속되어 매년 축제를 프로그래밍 하는 역할로 함께 하고 있다. 따라서 본 축제에서는 프로그래머/큐레이터라는 직함이 사용된다.

국내 무용계에선 많은 사람들이 ‘기획자=프로듀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무용계가 받아들이고 있는 ‘기획자’의 의미는 예술경영에서 이미 여러 파트로 세분되어 있는 기획, 행정, 홍보마케팅, 서비스 업무, 매니지먼트까지의 전반을 모두 혼자서 담당해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규모가 큰 정부 기관, 극장, 공공단체나 축제에서 일하는 PD들은 조금 다른 상황에 처해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PD들이 프로듀서의 범주를 넘어서는 영역을 도맡아 해야 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고, 민간단체를 맡고 있는 PD들의 상황은 물론 더 심각했다.


프로듀서는 예술의 핵심인 예술가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련의 창작 과정에서 가장 먼저 작품에 개입되는 예술경영인이다. ‘예술경영인은 예술가의 미학적 가치가 예술시장을 통해 상품적 가치로 전환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상황에 따라서 예술가와 함께 미학적 속성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이미 예술가에 의해 완성된 미학적 속성에 상품적 속성을 부가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1 비유를 하자면, 예술가를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전담하는 셰프라고 했을 때, 프로듀서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이 고객에게 전달되기까지 ‘요리’를 제외한 모든 업무를 관리하고, 책임지는 지배인의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프로듀서는 프로듀싱에 있어서 모든 전반적인 사항에 관여하게 되는데, 이러한 구조 때문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 배경이 만들어진 것 같다. 하지만 레스토랑이 운영되는 경영 상황을 더 깊숙이 들여다본다면 이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상상해 보라. 지배인 한 명이 음식을 주문받고, 서빙하고, 동시에 카운터에서 계산하며, 그 와중에 더 많은 손님을 모을 수 있도록 홍보계획과 전략을 세워 실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효율적인가? 물론, 규모가 작은 레스토랑이라 인력과 예산이 부족한 경우라면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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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푸름프로젝트그룹의 〈생산적생산〉(2021) 공연 포스터.
필자는 해당 단체와 10년째 함께하고 있다. 이 경우, 민간단체의 신작을 프로듀싱하는 제작PD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개인 예술가를 중심으로 창작 과정이 이루어지는 문학이나 시각예술과는 다르게 공연예술에는 작품의 저자 외에도 창작 과정에 참여하는 다양한 조력자들이 존재한다. 공연이 이루어지기 위해 무대기술, 창작(조명, 음악, 무대미술 등), 기획, 행정, 홍보 등 다양한 직무와 그 역할을 맡은 이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간다. 온전히 작품의 저자에게 크레딧이 돌아가던 예전과는 다르게 최근에는 콜렉티브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더욱이 작품의 저자뿐만 아니라 그를 존재하게 하는 주변 역할에 관한 관심도 커지는 것 같다. 이제 더는 작품이 저자 개인의 전유물로 인식되지 않으며, 저자를 존재하게 하는 조력자들 역시 저자성을 갖는다고 믿는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점을 바라보고 나아가며, 모두의 창의적인 생각과 감각, 노력을 담아내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시작점에서, 저자의 이름을 통해 세상에 소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력자들 가운데 프로듀서의 역할은 작품의 저자를 비롯한 다른 참여자들이 최상의 상태에서 공연이나 퍼포먼스를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동시에 정치, 행정, 경제, 사회, 기술, 문화 등의 주변 요소로부터 본질적인 내용(예술성)이 방해받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이 예술적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유통시장에 부합할 수 있도록, 예술가를 대신해 이성적 사고와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프로듀서는 시대가 요구하는 흐름을 읽고, 예술가의 예술적 방향성에 공감하며 그에 가장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도록 주변을 형성하는 역할을 맡는다. 때문에 프로듀서의 역할에는 많은 능력이 요구된다. 사회로부터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눈과 예술가의 예술적 가치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상황에 대처하고 여러 관계를 부드럽게 코디네이팅 할 수 있는 사회성 등 말이다. 또한, 최근에는 프로듀서의 역할과 비중이 커짐에 따라 프로듀서에게 창의력(Creativity) 역시 요구되고 있다. 프로듀서가 직접 작품 창작 과정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크리에이티브 한 프로듀싱을 통해 작품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 갈 수 있도록 만드는, 예술가의 동반자이자 파트너로서의 창의성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국의 많은 민간 무용단체가 지원금을 통해 재원을 조성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일까. 지원금을 공고한 재단 및 기관의 기획 의도가 자연스레 민간단체의 신작 제작의 기획 의도로 연결되어버리는 환경을 마주한다. 따라서 축제 기획을 제외하고는 기획자로 명명되고 있는 사람 중에 정작 제대로 된 기획(planning)을 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때문에 국내 무용계에서의 프로듀서는 기획을 하는 기획자(Planner)이기보다는 공연을 진행하는 진행자(Production Director)에 가깝고, 이로 인해 국내 무용계의 기획력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종종 나오는 것 같다.


진정한 의미의 ‘프로듀서’는 무엇일까? 이러한 역할에 대한 혼재는 결국 무용계에서 ‘프로듀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한다. 기획자가 제대로 된 기획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구축되고,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인식 재고 및 역할의 세분화가 이뤄진다는 전제하에 시대가 요구하는 ‘크리에이티브 한 프로듀싱’은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프로듀서의 저자성이 발생되며, 이렇게 발생된 저자성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예술가와의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지속 가능하게 할 것이다.

  1. 1)용호성, 『예술경영』(김영사, 2020)
박신애_코리아댄스어브로드 대표민간무용단체의 해외진출을 돕는 비영리기관인 코리아댄스어브로드의 박신애 대표는 무용 국제교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국제 프로듀서이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뉴욕92Y 하크니스 댄스센터에서 아시아/코리아 릴레이티드 프로그램의 게스트 큐레이터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국제 솔로 페스티벌 모노탄츠서울의 예술감독과 프랑스 파리 S.O.U.M 페스티벌의 큐레이터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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